꽃미남에서 연기파 배우로 완전히 변신한 디카프리오가 개츠비로 열연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았다.

    원작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그 유려한 문체는 가물가물하지만, 영화에는 영화의 영상미와 서술 방식이 있으니, 원작의 주제의식과 함께 이 또한 나름대로의 재미를 준다. 예를 들자면, 화려한 파티 장면이라든지, 뉴욕 아파트에서의 약물과 음주의 도가니 같은 것들. 덕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듯 한 재미는 없었지만, 2시간 반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원작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한 무거운 주제들은 영화의 구석구석에 스쳐지나듯 묘사되어서, 일부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 시대가 현재인지 1920년대인지 의식속에서 사라진다. 인종차별 문제야 지금에 있어서는 흑인 대통령이 나올 정도이니 어느 정도 엷어진 느낌이 있다지만, 빈부격차야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여전할텐데 너무 가볍게 다루는 바람에 원작의 무게를 희석시킨 것 같다. 닉 캐러웨이의 우울증, 불면증, 공황장애... 긴 병명의 리스트로 그 것을 대체하려고 한 것인지. 


    그렇지만, 닉이 전해주는 제이 개츠비 - 톰과 데이지 뷰캐넌 부부의 삼각관계는 '살아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수일과 심순애>로부터 최근의 <건축학개론>에 이르는 젊은 남자의 사랑 실패 공식은 미국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 잘 나고 돈 잘 벌고 위대하기 까지한 개츠비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첫 사랑의 실패. 


    어디 이수일부터 이겠는가? 아마 구석기시대부터 젊은 남자는 무수한 사랑의 실패를 해왔을 것이다. 그 공식을 한 번 요약해 본다.

    젊은 남자가 사랑에 눈을 떠 젊은 여자에게 구애한다.

    젊은 여자는 처음에는 젊은 남자를 사랑한다.

    곧 젊은 여자가 매력적이란 것을 알아챈 능숙한 남자가 여자를 가로챈다.

    젊은 남자는 능숙한 남자가 가진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되지만 이미 젊은 여자는 능숙한 남자의 것.


    보통의 이야기는 슬퍼하는 젊은 남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후 점점 어두워지면서 끝난다. 

    <위대한 개츠비>는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이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츠비는 이미 남의 아내가 된 데이지를 한 번이라도 다시 보기 위해 그녀의 집 건너편에 꿈에서나 볼 듯한 화려한 저택을 짓고 꿈같은 파티를 매주 열어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그러던 어느날, 닉을 통해 데이지를 마침내 만나게되고 그녀가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러나, 데이지는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다.

    톰 뷰캐넌과 제이 개츠비가 데이지 앞에서 벌이는 한 판 격전을 통해 그녀는 개츠비의 실상을 알게되고 결국 사랑의 도피는 불발된다. 


    잠시 데이지의 입장에서 보자. 개츠비를 사랑했으나, 또한 결혼식 직전에 개츠비의 편지를 받았으나 결국은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톰 뷰캐넌과 결혼 후 잠시의 행복을 누렸으나, 톰의 바람끼에 마음을 닫는다. 다시 만난 개츠비를 사랑하지만 당당히 밝히지는 못한다. 개츠비의 현실을 알고서는 다시 톰에게로 돌아간다. 사고를 치고난 후 그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 개츠비를 피해 톰과 함께 사라진다. 


    개츠비가 위대한 점은 바로 여기. 자신이 어떤 상황이던, 데이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 한결같은 사랑과 기다림. 게다가 그는 데이지에게 썅年이라 욕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그러나, 그 위대한 사랑도 비열한 속임수에 쓰러지고 세 사람을 죽게한 비열한 남녀는 잘먹고 잘산다. 


    차라리 욕하고 다른 사랑을 찾았다면 비극도 없고, 개츠비가 위대하지도 못했으며, 이 이야기가 더 이상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현실에 필요한 것은, 젊은 남자에게 얼른 포기하고 능숙한 남자로 업그레이드 해서 얼른 새 사랑 찾으라고 충고하는 것인가?! 


    ps) 그러나, 개츠비가 사랑한 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데이지를 사랑한 그 자신이다. 개츠비가 주먹을 치켜든 것은 데이지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욕을 받았을 때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사실은 허구라고 지적받았을 때이다.

    Posted by 김힐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