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계의 제3의 물결-<청진기가 사라진다>/ 에릭 토폴 저 / 박재영 외 옮김
원제 <The Creative Destruction Of Medicine>와 서문에서 저자는 슘페터를 의학적으로 원용하는 듯 보이지만, 나는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생각났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의학 혁명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는 예언서 <청진기가 사라진다>는 점점 발전하는 무선 센서들과 게놈 의학, CT scan이나 MRI와 같은 영상 기술, 빅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있는 전자건강기록, 그리고 이들의 융합이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합니다.
1. 유전체학
가장 인상깊고 큰 혁신의 중심이 될 부분은 유전체학 분야가 아닌가 합니다. 게놈 시퀀싱 기술의 발달을 통해 점점 빠르고 값싸게 전체 게놈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분석 기기의 크기도 점차 작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결국 임상에서 게놈 시퀀싱을 적용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개인화된 맞춤 치료를 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됩니다. 놀라운 점은 게놈 시퀀싱 비용 부분인데요, 전자기기의 가격보다도 더 빨리 낮아지고 있고, 현재는 단지 몇 십만원의 비용이 소모될 뿐이라고 하네요. 가까운 미래에는 몇 만원, 몇 천원 수준의 저비용으로 검사가 가능하겠죠.
2. 무선센서와 원격의료
무선센서에 관한 부분은 우리가 이미 늘 손에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개념이 손에 들고 다니는 컴퓨터(hand held personal computer)에서 온 것이며, 여기에 새로이 개발되는 센서들-중력 센서, 조도 센서, 근접 센서 등-이 장착되어 스마트폰은 점점 더 스마트해지고 있죠. 거기다, 항상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점도 역시 의료기기로서의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즉, 간단한 센서가 내장된 확장 키트를 통해 데이터를 스마트폰에 입력하면 스마트폰 앱을 통해 그 데이터를 처리해 바로 결과를 보여주거나, 데이터를 의료기관에 전송하여 결과를 앱을 통해 받아볼 수 있는 방식이죠. 이러한 방식의 원격 의료는 점차 환자가 병원을 찾아가야할 이유들을 줄이게 될 것입니다.
3. 이미징
이미징에 관한 내용 중 인상적인 부분은 의료 소비자가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검사에 임해야 함을 알려주는 내용이었죠. 아래 표에 각종 검사에서 우리가 피폭되는 방사선량을 나타냈습니다.
검사 종류 |
성인기준 피폭량(mSv) |
가슴 엑스레이 촬영 대비 피폭량 |
공항 보안검색 장치 |
0.002 |
0.1~0.2 |
치과용 엑스레이 |
0.005~0.01 |
0.25~0.5 |
가슴 엑스레이 |
0.02~0.1 |
1 |
유방 촬영술 |
0.4 |
20 |
CT 촬영(머리) |
2 |
100 |
CT 혈관조영술(심장) |
16 |
800 |
핵의학 검사(폐) |
0.2 |
10 |
핵의학 검사(심장) |
41 |
2,000 |
혈관조영술(뇌) |
5 |
250 |
혈관조영술(심장) |
6 |
400 |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 |
15 |
750 |
연간 피폭 허용량이 1mSv임을 생각한다면, 검사를 통해 꽤 많은 량의 방사선에 노출되며 이로 인한 2차 피해(암 발생 등)도 분명히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관련 기사 링크] 이 책의 내용처럼 무작정 검사하기 보다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검사해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4. 의료소비자가 알아야 할 사실들
이외에도 의료 소비자로서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플라빅스(약품 정보 링크)]라는 항혈전제를 예로 들었습니다. 2010년에만 전 세계에서 9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 '잘 팔리는' 약인데요, 이 책에 따르면 플라빅스가 효과 없는 사람이 30%에 이른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 경우엔 심장에 시술한 스텐트에 혈전이 생길 위험이 최소 300% 증가하며, 혈전이 발생할 경우엔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개인화된 치료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대사 능력, 유전자, 나이, 성별, 체중이 모두 다른 사람이 같은 용량의 약에 같은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란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제약회사에게는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대사능력, 유전자, 나이 등등을 모두 측정한 후 거기에 맞춰 처방하는 약은 쉽게 말하면 팔리기 힘든 약인 것이죠. 환자에게는 불편하지만, 의사와 제약회사에게는 더 없이 편리한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2005년 존 이오아니디스는 <발표된 연구결과들 대부분이 거짓인 이유>라는 글을 저널에 게재하여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며, 저자는 이 결론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연구 규모가 작을수록 연구 결과가 진실일 가능성이 낮다.
- 영향이 작은 연구일수록 진실이 가능성이 낮다.
- 금전적 혹은 다른 이해관계가 클수록 진실일 가능성이 낮다.
- 한창 인기 있는 분야일수록(더 많은 연구팀이 연관되어 있을수록) 진실일 가능성이 낮다.
이런 복잡하고 진실을 찾기 힘든 의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의료 소비자들은 서로 뭉치게 됩니다. 그 결과물이 PatientsLikeMe(나와 같은 환자들)나 Curetogether.com과 같은 사이트들이죠. 여러 사람들이 먹는 약품들, 부작용들, 용량들에 대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죠. 동병상련의 힘. 이 같은 힘이 모이면 결국 의료 시장을 변화시키는 데 한 몫을 할 겁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상황은 아직 여기에서 한참 멀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5. 우리나라의 미래 의료는?
우리나라로 시선을 돌려 생각해보면, 여러가지로 미국에 비해 뒤쳐진 부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 제도라는 제도적 우위는 가지고 있으나, 의료의 제공자와 소비자의 권리 관계를 따져본다면, 우리나라 의료 소비자의 권리는 너무나도 미약하고, 제공되는 정보는 보잘 것 없으며,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찾기 힘들다는 겁니다. 이미 이런 환경에 길들여져서 제공되는 것만을 비판없이 수용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미래에 저자가 상상하는 새로운 의학의 물결이 밀려들 수 있을까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혁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혁신의 힘마저 자기의 것으로 하려는 의료 기득권층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스마트폰을 통한 손안의 병원도 대기업이 차지하고 말 겁니다.
얼마전 발표된 S사의 새로운 스마트폰 기능 중에 'S 헬스'라는 기능이 탑재된다고 합니다. 사용자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고 건강 정보를 제공하며, 운동으로 소모한 칼로리 계산을 가능하게 해주는 초보적인 형태의 건강앱입니다. 지금은 코웃음을 칠 수준이지만, 그 S사가 미래 성장 동력으로 선정한 것이 '헬스 케어'산업이며, 메디슨이라는 회사를 인수하여 '삼성메디슨'을 출범시켰다는 것을 알고 본다면 마냥 웃어넘길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암울한 상상이지만, 의학 혁신의 달콤한 결실은 의료 소비자에게 넘어오지 못하고 대기업의 손안에 머물 것이란 것이 제 예상입니다.
어두운 상상을 하나 더 덧붙여 보자면, 저자의 다른 장미빛 예언도 대부분 의료소비자에게 직접 돌아오기 보다는, 의사나 제약회사와 같은 의료 공급자가 먼저 가로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검사비의 지출, 의료 정보의 유출로 인한 문제점 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혁신이 지체될 겁니다. 저자는 소제목 '디지털 디스토피아'에서 이와 관련된 불안을 조금 다루고 있지만, 적은 분량만큼이나 그 내용은 피상적입니다.
6.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의료 소비자가 똑똑해져야 합니다. 휴대전화만 똑똑해선 오히려 사람이 당합니다. 무조건적인 의심은 오히려 나쁜 결과로 인도할 수 있겠지만, 합리적인 질문과 의약품 과신을 경계하는 자세는 의료소비자의 필수 소양입니다. 이 책은 이런 의료소비자를 위해서도, 또 새로운 시대의 의료를 따라잡기 위한 의료인을 위해서도 일독을 권할만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