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 <안나와디의 아이들>, 캐서린 부.
책과 사람
2013. 11. 28. 17:24
때로는 논픽션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경우가 있다. 이 책, <안나와디의 아이들>이 딱 그런 경우다.
저자 캐서린 부는 <워싱턴 포스트>를 거쳐 <뉴요커>에서 일하는 기자로서, 늘 빈곤과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인도에서의 장기 프로젝트를 늘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었으나 실행을 못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본인의 집에서 사전에 걸려 넘어지면서 늑골 골절과 폐파열을 겪은 것을 계기로 인도에 직접 뛰어들기로 하였고, 이후 4년 간 인도인들 속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실제에 바탕을 두고 재구성 한 책이 <안나와디의 아이들>이다. 이 르포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수 많은 대화와 자료 수집, 영상 녹화 등을 통해 반 쯤은 등장 인물들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왔던 노력의 결실을 그 방식 그대로 책에 담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누군가의 생각으로 묘사된 부분은 당사자가 자기 심정을 나와 통역자, 또는 동행인에게 토로한 내용이었다." - 에필로그 중에서
거기에 더하여, 인도의 현실이 지금의 우리나라 기준에서는 픽션에 더 가깝다는 것 역시 이 이야기가 마치 소설처럼 읽히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상상의 산물이 아니며 여전히 수 많은 인도의 아이들이 안나와디의 아이들과 비슷하게 살고 있는 사실이, 또 우리 주변에도 이 이야기의 변주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리고 이 악순환을 끝마쳐줄 메시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책을 끝낸 마음을 비 온 뒤 흙탕물처럼 만든다. 흔들어 놓은 흙탕물은 처음엔 흐려졌다가 한참 지나면 투명해진다. 그러나 바닥에는 더욱 진한 침전물이 쌓인다.
책은 넝마주이 압둘이 2008년부터 2011년 까지 겪은 사건을 중심으로 안나와디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 미래를 이해하는 방식들을, 즉 삶 그 자체를 조각내어 보여준다. 제한된 공간과 제한된 시간 속에 있는 사건들이지만 그 사람들 깊이 들어간 저자 덕택에, 인도 영화인 <슬럼독 밀리어네어>나 <세 얼간이들>보다 더 깊숙히 인도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그 단면들은 피상적인 인도를 실제적인 인도로 만든다.
이 살아있는 인도, 그 중에서도 안나와디의 사람들은 카스트와 종교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빈곤으로 인해 늘 고통받는다. 그 반복되는 고통은 그들의 생각을 담금질하는 것인지, 안나와디 곳곳에서 펼쳐지는 사건들 사이사이에 드러나는 인도 사람들의 (또는 저자의) 통찰력은 너무나 날카로워 한 번 씩 서늘함을 느낀다.
"...(전략)... 부패는 사라지지 않았고, 조금 약한 약자가 많이 약한 약자를 착취하는 것 같은 오래된 문제들은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서구와 인도의 일부 엘리트들은 부패라는 말을 순순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했다. 그건 현대화와 세계화를 향한 인도의 야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부패로 아주 많은 기회가 약탈되는 나라에서 부패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몇 안 되는 순수한 기회였다."
한국은 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하는 생각들은 누구나 한 번 씩은 해 보았으리라. 그에 대한 답을 쉽사리 내놓지 못하는 것도 조금의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실제 사회 현상이 단 한 가지의 사실로 설명되는 경우는 없으니까. 그러나, 한 두 가지의 다소 그럴듯한 이유들을 생각해 낼 수도 있는데, 윗 글이 그런 이유 중의 하나와 연결되었다.
안나와디 그 이상의 현실 속에 살았던 우리나라의 50년대, 순식간에 벌어지는 빈부 격차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그 이후의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의 한 단편이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그 시기를 겪었던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그 시기를 부정당하면 분노하게 되었다.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훨씬 잘 살 수 있는데, 그 요령이 없는 자는 무능한 자로 치부되고, 요령이 있는 자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그럴수도 있다'거나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로 손쉽게 넘어가 주는 세상이 되었다.
최근에 회자되는 "한국을 가리킨 예언"이 바로 그 이야기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덕·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는 더 악한 자에 의해서만 쫓겨날 수 있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헨리 조지(Henry George) -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 1879)"
이 이야기가 현재진행형인 안나와디에선 사람들이 이미 길들여져 있다.
"그들도 수바시 사완트가 부패했다는 건 잘 알았다. 카스트 증명서도 위조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기 와서 얼굴이라도 내미는 건 그 사람뿐이야.""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자신들에게 다시 돌아온다.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똑같이 무력한 다른 개인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가끔은 서로를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썼고, 가끔은 그 과정에서 파티마처럼 스스로 무너졌다. 아샤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로채서 팔자를 고쳤다."
세상은 점점 더 팍팍해지고, 스트레스는 점점 더 늘어만 간다. 딴지일보의 김어준이 그랬다고 한다.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은 정치라고.
우리나라를 인도와 비교하다니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만, 근본 원인은 같다. 정치에서 눈을 돌려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