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깊은 그늘과 그 보다 더 큰 열정.
책과 사람
2012. 12. 14. 16:34
마음 속에 구멍을 안고 사는 사람.
그 구멍이 그의 에너지와 욕망의 근원이었을 거야.
스티브 잡스는 한 마디로 평가하기 참 힘든 사람이야.
어떤 사람들은 기술도 모르는 장사치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희대의 천재로 생각하기도 하지.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잡스는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어. 불같이 화내고, 송곳처럼 아픈데를 쑤셔대고, 엄청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잡고, 스스로의 생각마저 왜곡하는 괴이한 정신력의 소유자였지.
그 괴이한 성격을 이루는 뼈대 몇 가지를 추려보자면, 출생에서 비롯된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양아버지의 장인 정신, 히피문화와 LSD, 선(禪) 같은 것들이 있어.
잡스는 친부모의 사정상 태어나 곧 양부모 가정으로 입양되었는데, 양부모님은 그가 어릴때부터 입양된 사실을 밝히고 키웠지. 양부모가 냉정했다거나 그런건 전혀 아니야. 오히려 애정을 듬뿍 쏟아 키웠지. 그런 애정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에겐 큰 상처가 되었었나봐.
그를 키워낸 건 다시는 버려질 수 없다는 절박감인것 같아.
다행히도 잡스에겐 그 절박감에 상응할만한 능력이 있었어.
뛰어난 통찰력과 직관. 인문학적 소양.
잡스의 완벽주의도 한 몫했지.
애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잡스는 빠질 수가 없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냐면 아이폰 유리와 테두리 소재, 애플스토어 바닥에 깔 돌, 아이패드 아이콘 모양 하나하나 까지 다 따졌다고 하네. 물론, 애플의 뛰어난 직원들이 A 플랜, B 플랜, C 플랜을 들고가면, 신나게 욕해주고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잡스 스스로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경우도 많았어. 그러면 엔지니어들은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시지프스가 되는거지.
그는 운도 좋은 편이야.
70년대의 미국이 키워낸 그의 미적 감각이 글로벌한 미적 감각에 통할 수 있었기에 상업적으로도 성공이 가능했지. 서랍의 뒷면까지 완벽하게 만들라는 아버지의 교훈도 빠질 수 없었고.
거기에 타이밍이 절묘했다고 해야하나? 휴렛과 패커드의 다음 세대이자, 빌 게이츠와 워즈니악과 같이 자라났고, 조너던 아이브와 같은 디자이너를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잡스의 시대였어.
이 시대야 말로 문화, 예술, 기술, 마케팅, 유통이 결합되어서 새로운 물결을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시대인데, 문화 예술 기술의 교차점에 스티브 잡스와 i시리즈가 설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만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누구나 잡스가 되는 것은 아니니, 단순한 운이라 볼 수 없어. 왜냐면,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교차점에 올랐던 인물이 없거든.
또한, 단순한 장사꾼이라면 당연히 이런 일을 할 수도 없는 것도 당연지사.
그러나,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는 아니라고 생각해. 시대를 선도하는 천재쯤이 맞겠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했어. 주어진 다음에야 '아 이게 내가 원하던 것이군'이라 느낀다는 거지. 오만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그가 가졌던 또 다른 운은 사람운이야.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실천에 옮겨줄 뛰어난 사람이 필요했는데, 조너던 아이브, 존 래시터, 팀 쿡이 바로 그들.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선택하고, 어떤 사업에 힘쓸지를 선택하고, 어떤 소재를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잡스는 중요한 선택을 누구보다도 많이 했어.
그 선택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성공적인 선택을 했지. 그게 대단한 점이야.
사실, 나도 애플의 기기들이 마음에 드는데, 그 이유는 조너던 아이브와 스티브 잡스의 디자인 철학과 그 결과물이 마음에 쏙 들기 때문이지.
기능성과 미적 감각의 조화.
편리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좋은 디자인은 더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뺄 것이 없는 상태.
이런 구호들이 실제로 구현되다니, 이건 참 대단하다고 할 밖에 없어.
반면, 사람의 변화를 추구하는데, 이 의지에 반하는 고집은 사용자를 질리게 하는 부분이야. "우리는 이미 완벽한 물건을 만들었다. 너희는 이대로 써라."
안드로이드 휴대폰을 써보면 사용자 환경을 사용자가 고를 수 있어. 배경화면, 소리, 사용자 인터페이스 등등. 애플의 물건들은 정해진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어.
사실, 자유도와 완벽함은 공존하기 정말 힘들어. 잡스는 자유도를 버리고 완벽을 추구한 것이지. 그렇지만, 사실 좀 고집스럽다 싶은 생각이 들어.
또 다른 불만의 초점인 iTunes와 아이튠즈 스토어. 익숙해지면 편하다지만, 사실 불편한게 맞아. 불편함과 편함을 느끼는 건 우리 자신이지, 누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니까. 나 같은 경우엔 음악을 뒤섞어 버리는 아이튠즈가 정말 짜증 나더군.
하지만, 저작권 보호를 위한 적극적 방법으로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우리나라 저작권 보호는 저지른 사건을 겨우겨우 뒤따라 가는 방식이야. 액티브액스, 아청법 등의 방식이 좋은 예.
우리나라에서 음반, 영상물, 게임의 저작권을 보호하고 저자와 제작자에게 충분한 수익을 돌려주려면, 최소한 웹하드나 토렌트보다 편리한 방식을 제시해 주어야 해. 잡스는 그 해법으로 아이튠즈와 아이튠즈 스토어를 들고 나온 것이지. 정말 현명한 방법이야.
"음악을 훔치는 사람들의 80%는 그런 행동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단지 합법적 대안이 없어서 그럴 뿐이지요." 잡스의 말.(p. 627)
소시적, 세계 위인전기를 읽었었어. 위인들은 정말 대단하고 훌륭하고 선하기만 하더군. 그런 현실성 없는 전기를 읽다보니 재미도 없고, 현실성도 없더군. 그래서 한참동안 전기를 읽지 않았었지.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아니더라고.
스티브 잡스의 생애 흐름에 적절히 에피소드를 섞어둬서 소설처럼 잘 읽히면서도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줘. 좋은 점 뿐만 아니라, 나쁜 점까지. 저자가 과도한 주관의 개입을 철저히 경계했다고 할 만하지.
스티브 잡스가 워낙 극적인 인물이라 그에게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여러가지 생각할 모티브는 충분하더군.
언젠가는 아이폰으로 촬영하고 개러지밴드로 음악을 편곡하고 아이무비로 편집해서 영화 한 편 만들어보고 싶네. 이런 걸 가능하게 해준 잡스 옹에게 감사를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