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재밌게 읽을 책으로 필립 K. 딕의 SF 두 권을 골랐다. SF는 나에게 언제나 즐거운 장르이기도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토탈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의 원작자인 필립 K. 딕의 책을 언젠가는 읽어보겠노라 다짐했던 때가 지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손에 닿는 대로 황금가지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와 폴라북스의 <화성의 타임슬립>을 우선 장바구니에 담았다. 두 번역을 비교한 후 한쪽의 출판사를 고를 예정이다.


    화질에 눈물흘리면서 봤던 블레이드 러너 ㅠㅠ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인 <안드로이드...>의 느낌을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친구가 정말 괜찮다고 해서 나간 소개팅 상태의 첫 인상, 참 촌스럽다.

    그런데, 이야기를 좀 나눠보니 성격이 정말 괜찮네? 친구가 정말 괜찮다는게 이 말이었구나.

    마침내 헤어질 때가 다가오는데, 이 사람이 점점 사차원이다. 당황스럽네.

    그런데, 집에 와서 사차원 대화를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이 사람 정말 진국이다 싶었다"


    작가인 필립 K. 딕은 1928년 생으로 1953년부터 30년간 100편이 넘는 단편 소설을 썼다고 한다. 특히, <안드로이드...>는 1968년 작이니, 지금으로부터 45년전 작품이다. 

    그러니, '펜필드 기분 전환기'같은 번역투의 단어들과 합쳐서 어색한 느낌이 물씬 날 수 밖에. 그래서 책 읽기의 초반은 가속도가 잘 안나는 차를 탄 기분이다.

    그런데, 시간을 들여 읽어나가자 이야기의 강한 힘이 내는 흡인력이 가속도를 부여한다.


    '펜필드 기분 전환기'는 단추만 누르면 기분을 바꾸어 주는 기계의 이름인데, 번호에 배정된 기분이 정해져있다. 예를 들면 무슨 방송이 나오든 상관없이 TV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욕망의 8888번. TV 방송국이 좋은 번호 땄구나.

    그 당시의 미래인 지금에 이르면,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기분을 바꾸어주는 음향시스템, 폭발직전의 상태로 오더라도 평안을 느끼게 해주는 아로마 테라피, 단추 크기보다 작지만 삼키기만 하면 우울을 날려주는 알약같은 현대판 '펜필드 기분 전환기'가 여기 저기 존재한다.


    작가는 한 번 더 나의 뇌속을 휘저어 놓는다.

    "다이얼을 누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려고 대뇌 피질을 자극하고 싶진 않아! 다이얼을 누르고 싶지 않을 때 가장 누르고 싶지 않은 번호가 바로 그거야. 왜냐하면 그 번호를 누르고 나면 다이얼을 누르고 싶어지고, 다이얼을 누르고 싶다는 건 지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낯선 욕구니까.(후략)."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은 과연 진정으로 내가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누군가의 의지가 나도 모르게 내 행동에 반영되는 건 아닐까? 


    책 표지들<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의 책 표지들. 1999년 이후에도 더 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기계인 '감정이입기'는 종교에 대한 작가의 사색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기계를 잡으면, 거기에 접속하고 있는 모두가 한 번에 모두의 감정을 융합하게 되는데, 이 감정을 이끄는 이는 '윌버 머서Wilbur Mercer'.

    그는 마치 시지프스 신화처럼 바위산을 꾸역꾸역 올라간다.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또 올라간다. 인간이 가진 딜레마를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상황도 극복해내게 만드는 의지의 상징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면서 돌팔매를 당하는 예수의 비유인 것일 수도 있다.


    Titien의 시지프스Titien의 시지프스


    감정에 진폭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 '감정이입기'를 통해 그 진폭을 서로 상쇄하여 현실을 견뎌 나가는 것 같다. 종교란 어떤 현실이라도 그 것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 있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종교의 개념에 의문을 던진다.

    윌버 머서가 오르던 그 언덕은 영화세트이며 옛날 배우가 연기 한 것이라는 사실이 버스터 프렌들리에 의해 폭로되고 감정의 융합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혼란을 겪는다. 

    그 이후 이지도어와 릭 데커드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할 때 윌버 머서가 현실에 나타나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 것 역시 '감정이입기'에 빠진 환각이거나 자신의 그림자를 착각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에 깊게 영향을 끼친 윌버 머서는 정말로 신적 존재로 보아야할까?


    <안드로이드...>는 다른 로봇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대비하여 더욱 강렬하게 인간성에 대한 생각들을 내비춘다. 그 뿐 아니라, '특수자'라 불리는 방사능 낙진에 의한 돌연변이를 등장시켜 인간을 구분짓는 경계를 흐려버린다.

    특수자 이지도어는 너무나 인간적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특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한편, 안드로이드 사냥꾼인 '필 레시'는 인간임에는 틀림없으나, 스스로가 인간인지를 의심할 만큼 인간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주인공 '릭 데커드'가 사랑을 나누는 자는 안드로이드인 '레이첼 로젠'뿐.

    작가는 생명의 자체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라든지, 감정이입의 가능을 인간성의 특징으로 은근하게 설명하면서도 안드로이드 역시 기계 생명이 아닌 생명체로 보는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어서 읽는 이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다.

    '도대체 인간과 아닌 것은 어디에서 금을 그어야 하는 거야?'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사전으로 보내버리는 이 작자.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저자
    필립 K. 딕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8-12-3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세기 최고의 SF로 추앙받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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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사실 하나.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의 운영체제 중 일부는 애플의 iOS이지만, 최근엔 안드로이드가 대세다. 마침 그 안드로이드의 레퍼런스 시리즈 이름이 넥서스라는 것은 구글이 필립 K. 딕에게 보내는 헌사일까? <안드로이드...>의 가장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의 시리즈 이름이 '넥서스-6'다.


    Posted by 김힐링